^꿈의 무대로 평가되던 미 메이저리그.94년 한국인 최초로 진출한 선수가 바로 박찬호 였다. 야구계 뿐만아니라 팬들도 놀라움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정도였으니 그당시 분위기를 알수 있다. 정말 LA 다저스에 입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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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 그의 활약상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메이저리그 직행의 기쁨도 잠시일뿐 2년간 마이너리그행 '눈물젖은 햄버거'와 'I can do it' 를 가슴에 새기며 칼을 갈고 또 갈았다. ^
드디어 96년 4월26일 시카고 컵스전서 메이저리그 첫 승. 한국야구 뿐만아니라 한국인의 가능성을 일깨워준 하나의 쾌거 그자체였다. 2002 LA 다저스에서 이적. 현재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몸담고 있는 박찬호의 '귀 빠진날'은 진정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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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감히 "93년1월10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일간스포츠가 특종 발굴한 "156km 박찬호, 사상최고 광속구투수 '탄생' " 지면으로 독자와 팬들에게 첫 선을 보인 날짜이기 때문이다.<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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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한양대 1학년생이었던 박찬호는 제47회 전국대학 야구선수권 대회 영남대전서 무려 156km 의 강속구를 기록 주위를 깜짝 놀라게했다.이 기록은 당시 삼성 스카우터였던 이문한씨의 스피드 건에 이 광속구의 숫자가 무려 4차례나 찍혔다고 한다. 이날 사용한 스피드 건은 일제 미즈노 신형으로 오차 범위가 2~3km정도라 했다.

^ 아뭏튼 우완정통파 투수인 최동원,선동렬,박동희,정민태선수가 전성기 최고 스피드가 153km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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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호주 아시안 선수권 국가대표에 발탁된 박찬호 선수는 자연스럽게 일간스포츠 취재 덫에 걸려 그해 1월9일 편집국에 인터뷰차 입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그가 어떻게 시내판 1면 톱 사진이 게재 됐는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을 까한다.

^9년전 93년 1월9일 햇살을 감춘 오후 3시 쯤 박찬호가 인터뷰후 사진부을 찾았다. 단정한 캐쥬얼 복장을 한 그는 야구선수라곤 큰 키외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사진취재 의뢰서에는 한양대 광속구 투수라 적혀 있었다.

^운동선수의 인터뷰인지라 필자는 일반적 클오즈업사진과 제스처 사진으로 마무리를 했다. 물론 필자도 이 선수가 대단한 투수라곤 생각치 않았다. 잠시 후 사진부장이' 야! 이호형'

^'예' "나가서 훈련처럼 사진 취재해봐' 아니 유니폼도 안 입고 온 선수를...(독백)
지금은 없어진 회사 근처 광화문 중앙박물관에 도착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박찬호! 한양대 92학번"예" 난 82학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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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세요" "무슨 과..." "신문팔이학과" "네--에" 잠시후 ㅎㅎㅎ 역시 센스있는 웃음을 지었다.
분위기가 좀 좋아서 박찬호 선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유니폼도 없으니 간단히 '캥거루 점프' 나 한번하자고 제안하자 박 선수는 곧바로 수용했다. 대충 마무리가 되고 회사로 오는 도중 인간 족쇄 "삐삐"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아!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삐삐.

^부장의 호출이었다. 문자메세지 '8282' "오메! 오늘따라 82숫자가 나의 뇌리를 사로잡는구나"
다행히 회사인근이라 잽싸게 편집국으로 들어가자 부장은 "이호형' "그 선수있지 1면 톱이야" "네--" "그러니 동대문 야구장가서 사진취재해와" 그리고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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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난감했다. 아니 유니폼도...,글로브도...,공도 없는데.
이유불문이다. 기자정신은 제정신이 아니니까 맘으ㅡㄹ 다스린후 박찬호 선수에게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OK였다.
둘은 합심에 동대문 야구장 인근에 위치한 야구 용품점에서 사정얘기를 한후 한양대 유니폼 일체를 잠시 임대받았다. 정말로 고마웠다.하지만 스파이크는 안된다고 한것이다.

^"아저씨, 이왕이면..." 아저씨 왈"흙 뭍지" "아! 네~"
'이것도 감지덕지해야지' 읖조리며 우린 야구장으로 늑의양양하게 향했다.
이때 시간이 해가 땅에 떨어질려는 오후 5시쯤 이었다. 92년 봉황대기 고교야구때 뻔질나게 다니던 곳이라 무작정 들어가려 하자 경비원 아저씨가 두손 저으며 "안돼 안돼 "를 외치는 것이었다. "아저씨! 저 몰라요 작년 여름에 봉황대기때..."하면서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때를 썼건만 허사였다. 온 몸에 힘이 쫙빠진 상태. 슬슬 열받기 시작했다. 박찬호 선수도 약속시간이 다가오고 어둠도 점점다가오니 필자로썬 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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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경비원 아저씨 왈 "야~ 이 카메라 비싸죠"하며 자신의 사진 취미를 열거하는게 아닌가 이때다 싶어 "아저씨" 필름 2통 OK!.O~~k!
서로간의 'OK'가 메아리가 되어 박찬호 선수의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무사히 취재할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일간스포츠 1면 톱 기사와 사진이 게재 되던날이 93년1월10일었던 것이다. 이로써 박찬호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 팬들에게 첫 인사와 메이저리그 행이 시작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        
      코리안 특급   박찬호(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제1회 WBC에서 한국팀의 정신적 지주였고
       '사무라이 재팬'을 표방한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는 제2회 WBC 정신적 지주다.

     하지만 박찬호는 자신이 동원할수 있는 승리의 영혼을 멀리서 전달하고 있고 극일을 향한
    대한민국의 라인업과  '국가에 있기에 야구가 있다'라고 외친 김인식 '국민감독'이 있는한
    제2회 WBC에서 한국 위상은 드높을 것이다.
Posted by 리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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